‘낙태죄 폐지’, 한 달 동안 23만 명 청원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

※ ‘낙태(落胎)’라는 단어보다 ‘인공임신중절’, 혹은 ‘임신중절’이라는 표현을 지향하나 형법에서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조항이 ‘낙태’이므로 기사에서 수차례 ‘낙태’가 사용되었음.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백악관 홈페이지의 "We The People" 서비스와 유사한 ‘국민청원’ 서비스를 시작했다. 백악관의 ‘We The People’ 서비스는 30일 간 10만 명 이상이 청원하면 60일 안에 공식 답변을 제공한다. 즉, 미국 인구 중 약 0.003%가 참여하면 답변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국민청원’의 답변 기준은 ‘30일 간 20만 명 이상’으로, 대한민국 인구 중 약 0.4%가 참여해야 하는 높은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을 지난 10월 30일, ‘낙태죄 폐지’ 청원이 넘었다. 30일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인터넷의 접근성, 그리고 ‘국민청원’이 도입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올라온 청원이라는 부분을 감안하면 23만이라는 숫자는 더욱 의미 있는 결과다.

(미국 인구: CIA The World Factbook, 2017.07기준/대한민국 인구: 행정자치부, 2017.10기준)

   ■ ‘낙태죄 폐지’ 청원

   지난 9월 30일, 한 청원인은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이하 ‘낙태죄 폐지’)”라는 청원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청원은 30일 후인 10월 30일, 235,372명의 추천을 받으며 종료되었다. 청원 참여 인원이 청와대 답변 기준(30일 간 20만 명)을 넘은 건 ‘소년법 개정’ 관련 청원 이후 두 번째다. 현재 ‘낙태죄 폐지’ 청원은 청와대의 공식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며 헌법재판소 또한 2월에 관련 사건을 접수해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이다(2017년 11월 19일 기준, 26일 청와대는 공식 답변을 발표했다).

△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시된 청원 캡처.
(2017년 11월 19일 기준, 이후 26일 청와대 공식 답변 발표)

   ‘낙태죄 폐지’ 청원인은 청원을 통해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며 ‘임신이 여자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므로 더 이상 여성에게만 독박책임을 물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미프진을 복용하면 안전하게 낙태할 수 있으나 불법 낙태 수술은 자칫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며 ‘낙태죄를 만들고 낙태약을 불법으로 규정짓는 것이 이 나라 여성들의 안전과 건강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게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제 국내 도입을 호소했다.

   ■ 국민들은 ‘왜’ 낙태죄 폐지를 원하는가

△형법 제27장 제269조

   1953년 제정된 형법 제269조에 따르면 낙태에 대한 책임은 임신한 여성과 시술자에게 있다. 임신 과정에 참여한 남성은 온전히 처벌의 경계 밖에 있다. 이 법이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임신중절을 경험한 여성 중 상당수는 배우자 혹은 파트너가 동의해 임신중절을 진행했음에도(불법 임신중절시술을 진행할 때에도 성인의 경우 배우자 및 파트너,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기자 주), 배우자 혹은 파트너로부터 ‘네가 낙태했다는 사실을 신고하겠다’며 관계 유지 및 금전적 요구를 협박당한다. 이는 수많은 피해 사례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2011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이 법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한국의 형법 조항에 대한 재검토를 권고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와 사회적 낙인도 문제다. 국제 인권법과 세계보건기구(WHO), 유엔 인권위원회(UNCHR) 등은 임신중절 접근을 ‘인권의 문제’로 보고, 사회 구성원이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법과 의료 시설에 접근할 권리,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권리를 ‘기본적인 재생산 권리’로써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들은 임신중절이 불법이기 때문에 높은 비용을 지불함에도 안전하지 못 한 시술 환경으로 내몰려 신체적 안전에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자연유산 유도약인 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도 ‘기본적인 재생산 권리’로써 같은 맥락이다. 미프진은 2005년 WHO에 의해 안전성과 효과를 인증 받아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었다. 현재 전 세계 119국에서 승인된 약품임에도 한국에서는 유통과 소비 자체가 금지되어있다.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권익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는 국가라면, 당사자가 본인이 받게 될 의료 서비스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제공받고, 의료 과정을 선택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의료 서비스를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신중절이 불법인 우리나라에서는, 설명은커녕 정당한 의료 서비스를 기대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 언제는 낙태를 권유하더니 이제와선 침묵과 죄의식을 강요하는 국가

   여성을 ‘낙태’로 협박하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지금껏 여성의 몸을 ‘인구 통제의 도구’로 삼아왔다. 과거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하던 때에는 국가가 임신중절을 눈감아주었을 뿐 아니라, ‘낙태시술버스’가 마을을 돌아다녔다. 보건소에서는 루프 시술과 낙태 등을 권하고 진행했다. 심지어 한센병 환자들에게 국가 주도 강제 단종 및 임신중절시술을 행하기도 했다. 낙태죄는 말 그대로 사문화되어있었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서는 ‘저출산 시대’라며 여성에게 출산을 권유하고 낙태죄를 강화하고자 한다. 지난 정권 행정자치부가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며 지역별로 가임기 여성 수를 공개한 반인권적 행태와,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고자 한 보건복지부, 그리고 그런 보건복지부에게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가 ‘모든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며 반응한 사건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인간’이 아닌 ‘자궁’으로써 취급되는지 알 수 있다. 비당사자들이 임신, 임신중절,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임은 지워버린 채 서로의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모순은 국가가 낙태죄를 이용해 여성을 인구조절의 통제 수단으로써 이용한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단순히 낙태죄를 유지, 혹은 강화 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임신중절이 불법인 국가에서 더 많은 임신중절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작년에 WHO에 의해 증명되었다. 사회적 차별이나 성차별을 개선하는 대신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방법으로는 어떠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Battleground 269
ⓒ 2017. 한국여성민우회, 포토그래퍼 혜영

   오랜 기간 동안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등의 여성단체는 국가에게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왔다. 2016년부터는 국내에서 산발적으로 ‘검은 시위(폴란드에서 시작된 낙태죄 폐지 시위-기자 주)’가 일어나기도 했다. 낙태죄가 여성에게 ‘임신을 선택할 권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100% 피임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에게 자유롭게 합의된 섹스를 할 권리가 주어지면서 여성에게 임신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죄는 여성의 몸을 불법화하는 일이다. 성숙한 사회는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말지, 어떤 삶을 구성해갈지 국가의 책임과 사회적 지지 속에서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다.

   청원인이 청원에서 언급했듯 임신 지속 여부에 대한 여성의 판단은 태아가 살아갈 삶의 조건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을 강화하는 것, 모든 여성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기술과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 그리고 아이를 키울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 이서연

    18-01-02 10:47:14

    잘 쓴 기사에 댓글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달려왔읍니다8ㅅ8 1953년 제정된 법이 시행이래 아직도 수정된 적 없다는 사실이 넘나 충격적입니다. "국가는 지금껏 여성의 몸을 ‘인구 통제의 도구’로 삼아왔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사회구조나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쉽겠지만 결국 그 피해는 여성이 온전히 져야하죠... 태아의 생명권을 강조하기 전에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의 선택권이 있고, 국가는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역할을 해야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 잘 읽었습니당 :) +역시...문이진 기자님 최고네여 여성주의 기획기사에 개인기사에 칼럼에 부편집장이라니... 완벼카다!!!

    문이진

    18-01-10 01:27:40

    95년도에 개정된 적은 있어요!ㅎㅅㅎ

    웹마

    18-01-01 03:47:03

    #수정사항 : (미국 인구: CIA The World..... 부분 글자 크기 작게 수정했습니다.

    문이진

    18-01-22 09:43:54

    고맙습니다!